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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소 (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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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원소는 후한 말의 군벌로, 명문가 출신으로 청류파의 중심 인물이었다. 환관 세력과 대립하며 하진을 도와 십상시 주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동탁의 횡포에 반발하여 반동탁 연합군을 결성, 맹주로 추대되었다. 이후 하북 지역을 평정하며 세력을 확장했으나, 조조와의 관도 대전에서 패배한 후 병사했다. 그는 인재를 등용하고 백성에게 관대했지만, 우유부단함과 결단력 부족으로 인해 결국 세력이 몰락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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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소 (후한)
인물 정보
이름원소
원어 이름袁紹
로마자 표기Yuán Shào
본초 (本初)
출생불명
출생지예주여남군 여양현 (현재 허난성 상수이현)
사망일202년 6월 28일
사망지기주위군업현 (현재 허베이성 한단시)
배우자유부인
최소 1명 이상의 아내와 5명의 첩
자녀원담
원희
원상
가문원씨 가문
친척원안 (조상)
원기 (이복 형)
원술 (이복 동생)
양표의 아내 (누이)
고공의 아내 (누이)
원유 (사촌)
고간 (조카)
경력
관직발해태수 (勃海太守)
사예교위 (司隸校尉) (자칭)
거기장군 (車騎將軍) (자칭)
우장군 (右將軍)
대장군 (大將軍)
기주목 (冀州牧)
봉작미후 (郿侯)
소속후한
반동탁 연합군
원소군
군사 활동
주요 전투십상시의 난
동탁 토벌전
계교 전투
풍구 전투
원술 정벌전
관도 대전
기타 정보
사망 원인병사

2. 생애

2. 1. 명문가의 적자이자 청류파의 중심

원소는 원안의 고손자로,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숙부 슬하에서 자랐다.[48] 명문가의 자제였으나 어머니가 노비 출신이라 어려움도 있었지만, 젊어서부터 지도자적 기질을 보였다. 20세에 복양장으로 부임하여 청렴한 정치로 명성을 얻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상을 이유로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다.[48] 6년간 상을 치르면서 장맹탁, 하백구, 허자원, 조맹덕 등과 교류하며 환관의 전횡을 비판, 청류파의 중심에 섰다.[49]

원소는 환관들과 대립했고, 숙부 원외(袁隗)는 그에게 가문이 멸망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49] 하지만 원소는 184년 황건적의 난을 계기로 하진의 속관으로 벼슬을 다시 시작했다.[49] 이후 시어사, 호분중랑장을 거쳐 186년에는 갑훈, 유우와 함께 십상시 주살을 도모했으나 실행하지 못했다.

원소는 여남 원씨 출신으로, 원봉원외 다음 세대에 해당한다. 원소의 출생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는데, 《삼국지》는 원소가 원봉의 아들이자 맏이라고 주장하지만, 《위서》는 원소와 원술 모두 원안의 증손으로 인정받았다고 기록한다. 원소의 어머니는 원래 원봉의 하녀였으나, 원소가 태어나면서 첩의 지위를 얻었다. 원소는 원술과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원술은 원소가 원씨 가문의 "진정한 아들"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원소는 위엄 있는 풍모와 겸손한 성격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받았다. 조조 등 많은 사람들이 원소를 따랐고, 하옹이나 허유 등은 원술에게 가지 않고 원소를 따랐다. 이 때문에 원술은 원소를 더욱 미워하게 되었다. 당시 조정의 정치를 농단하던 환관 조충 등은 원소의 행동을 위험하게 여겼고, 원외는 원소에게 일족이 멸망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소는 하진의 부름을 받아 관직에 나아갔고, 시어사, 호분중랑장을 거쳐 188년에는 서원 팔교위 중 하나인 중군교위도 겸했다.

2. 2. 십상시의 난과 반동탁 연합군

189년, 영제가 붕어하고 하진이 집권하여 환관들과 대립하자, 원소는 하진에게 접근하여 환관 주살 계획을 바쳤다.[3] 하진은 처음엔 원소의 계책을 받아들였으나 하태후(何太后)의 반대로 마음이 돌아섰고, 스스로가 환관과 결탁하여 출세했기에 쉽게 포기했다. 이에 원소는 왕광, 정원, 교모, 동탁 등 지방 장수들을 수도 근교로 소집하여 하태후를 압박하는 계책을 세워 하진을 설득했다. 왕광에게 강노수 5백을 이끌고 낙양으로 오도록 하고, 교모는 성고에 주둔하게 했으며, 동탁은 관중으로 오도록 하고, 정원을 시켜 흑산적으로 위장하여 맹진을 불태운 다음 흑산적 소탕을 구실로 삼도록 했다.

원소의 협박이 거듭되고 맹진의 불빛이 낙양에까지 비추자 친 환관파 관료들은 모두 두려워하며 십상시 주살을 진언했으나, 하태후는 듣지 않았다. 십상시와 결탁하여 권력을 잡았던 하진은 이들이 몰살당하는 것을 꺼려 행동이 지체되었다. 원소는 하진을 거듭 설득했고, 하진은 원소를 관리 감찰과 낙양 치안을 담당하는 사례교위에 임명하고 가절을 내리는 등 막대한 권력을 부여했다. 원소는 황실 근위병들을 모두 자신의 심복으로 교체하며 태후와 환관들을 감시했고, 공포에 질린 하태후는 십상시 이하 고위직 환관들을 모두 파직시켰다. 십상시들은 하진에게 사죄하며 하진의 조치에 따르겠다며 애원했다. 원소는 하진에게 십상시들을 모두 처형할 것을 세 번 간하였으나 하진은 듣지 않았고, 십상시들에게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명령했다.

원소는 하진의 명령을 위조하여 모든 주군에 서찰을 보내 고위 환관의 친족들을 잡아들이고 심문토록 했으나, 9월 22일(음력 8월 25일) 하진은 환관들의 반격에 살해되고 만다.[4][5]

이를 전해들은 원소는 사병 백 명을 이끌고 수도를 장악하기 위해 장양 내각에서 임명한 친 환관파 관료들을 공격해 살해하고, 하진의 사망으로 인한 병사와 관료들의 혼란을 강경하게 수습했다. 또한 병사들을 이끌고 황궁을 공격하여 전투를 벌인 끝에 황궁을 점령했으며, 붙잡은 환관들을 노소를 가리지 않고 모두 죽였다. 이때 죽은 환관은 2천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십상시의 난)

하지만 원소는 정권을 잡는 데 실패했다. 혼란을 틈타 동탁이 낙양에 군사들을 이끌고 들어와 황제를 확보하고 정권을 장악했기 때문이다. 동탁소제의 폐위를 획책하였는데, 이로 인해 원소는 동탁과 심하게 반목하였다. 원소는 동탁을 준엄하게 꾸짖었으나 동탁은 칼을 어루만지며 협박하였다. 이에 원소는 칼을 뽑아든 채로 인사하고 나가버려[50] 좌중을 놀라게 하였다. 원소는 인수(印綬)를 낙양의 성문에 걸어놓고 낙양을 떠나 발해(渤海)로 갔다. 동탁은 원소를 죽이려 하였으나, 조정에 원소를 지지하는 사람이 많자 회유책을 써서 원소를 발해태수로 임명하였다.[51] 189년 9월 30일(음력 9월 3일) 동탁은 하태후를 죽였다.[52]

초평 원년(190), 원소는 반동탁 연합군을 결성해 맹주로 추대되었다. 그 해 동탁이 낙양을 불태우고 장안(長安)으로 천도했으며(4월 9일/음력 2월 17일)[53], 유폐되어 있던 홍농왕(弘農王)을 죽였다(3월 26일/음력 2월 3일).[54]

원소는 유우황제로 옹립하려고 계획하였다. 기주목(冀州牧) 한복과 공모하여 장기(張岐) · 필유(畢瑜)를 유우에게 사자로 보내 제위에 오를 것을 권하였으나, 유우는 이를 완강히 거절하여 무산되었다.[55] 결국 구심점을 잃은 연합군은 동탁과 자웅을 가리지 못한 채 붕괴되고 만다.

동탁은 제후를 진정시키기 위하여 음수, 한융, 호모반, 오수, 왕괴 등을 각지에 사자로 보냈다. 원소는 하내태수(河內太守) 왕광에게 음수와 오수를 죽이게 하였고[56], 한융만 명성과 덕망이 있었기 때문에 살아남았다.

2. 3. 하북 평정과 군벌화

초평 2년(191년), 공손찬동탁 토벌을 명분으로 한복이 지배하는 기주를 침공해 한복을 격파했다. 원소는 한복에게 종속되어 견제, 감시를 받는 입장에 있었으나 배후에서 공손찬의 기주 공격을 조장했다.[9] 한복이 패배하여 지배력이 약해진 틈을 타 영내에선 반란이 일어났고, 흑산적(黑山賊) 장연을 비롯해 어부라·장양 등의 군벌이 기주를 넘보았는데 원소는 이들을 모두 격파하였으며 패퇴한 장양·어부라는 원소에게 항복했다. 이로 인해 기주 내에서 위세를 얻은 원소는 한복을 설득하며 또한 협박했고, 겁에 질린 한복은 결국 원소에게 기주목의 자리를 양도한다.[29]

원소가 한복을 협박하여 기주를 빼앗는 데 이용당한 공손찬은 원소와 대립하고 있던 사촌동생 공손월(公孫越)을 파견하여 원술과 우호관계를 맺었다. 원술손견(孫堅)과 공손월을 파견해 원소의 간접적인 세력권 내에 있던 양성을 공격하였으나 오히려 패배했을 뿐만 아니라 공손월은 날아온 화살에 맞아 전사했다.[11] 공손찬은 더욱 대노하여 원소를 칠 것을 다짐하고 반하(磐河)에 군대를 주둔시켰다. 원소는 직접 대결을 피하고 발해태수의 직위를 공손찬의 종제 공손범(公孫範)에게 양도하면서 공손찬을 회유하려 하였으나, 공손찬은 청주(靑州)·서주(徐州) 일대까지 세력을 확대하여 더욱 강성해졌고, 마침내 기주를 공격했다(192년 1월). 원소는 계교 전투에서 공손찬을 크게 격파하였다.[11]

공손찬의 진형이 무너지자 승리를 확신한 원소가 방심하여 보병 수십 명만 이끌고 공손찬이 패퇴하는 것을 건너편에서 지켜보다가 퇴각하던 공손찬 휘하의 기병대 수천 명에게 포위되고 말았는데, 군사 전풍(田豊)이 원소를 구해 담 사이에 피난시키려고 하자 모자를 벗어 집어던지며'''"대장부라면 응당 적에게 돌진하여 죽는 것이 마땅하거늘, 어찌 담장 사이로 몸을 숨긴단 말인가!"'''라고 말하며 나아가 싸웠다.

공손찬은 계교 전투에서 대패하였으나 이후에도 거듭 군사를 일으켜 원소를 공격하였다. 원소와 공손찬은 평원군 일대에서 다시 만나 회전을 벌였고, 여기서 공손찬은 또다시 원소에게 대패하였다. 다급해진 공손찬은 초평 4년(193년) 초에 원소와 화친을 맺었다.

초평 4년(193년), 흑산적의 총수 장연은 원소와 공손찬이 싸우는 틈을 타 원소의 근거지인 (鄴)을 습격하여 위군태수(魏郡太守) 율성(栗成)을 죽였다. 원소는 업으로 진격하였고, 창암곡(蒼巖谷)에서 흑산적 두목 우독(于毒)과 장안에서 임명한 기주목 호수(壺壽)를 격파하고 1만 명을 참하였으며, 녹장산(鹿場山)에서 좌자장팔(左髭丈八)의 군대를 전멸시켰다. 또한 다시 청우각(靑牛角)·이대목(李大目)·황룡(黃龍)·좌교(左校)·유석(劉石)·우저근(于氐根) 등을 공격하여 대파하고 수만 명의 수급을 얻었다. 업은 3개월 만에 수복되었으며, 이후 흑산적과 교전을 거듭하여 이듬해에는 상산(常山)에서 장연까지 격파하였다.

공손찬은 화친을 맺고 후퇴하였으나 장연의 공격으로 원소가 위기에 몰리자 곧 이를 파기하고 다시 원소를 공격하였다. 장연과의 싸움을 끝낸 원소는 유우의 아들 유화(劉和)를 앞세워 공손찬에게 공세를 펼치기 시작하였다. 또한 원소는 오환(烏丸)·선비(鮮卑)·흉노(匈奴)를 비롯한 북방의 기마민족들에게 우호적인 자세로 유화책을 펼쳤고, 평소 공손찬의 강경책에 시달려 오던 이들도 원소에게 적극적으로 호응하여 공손찬을 공격했다.

흥평(興平) 2년(195년), 포구에서 원소군과 전투를 벌인 공손찬은 참패하여 수만 명의 군사를 잃었고, 각지의 반란으로 인해 그 위세가 극도로 약해져 몰락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공손찬은 역경(易京)에 요새를 짓고 수비에 전념하였다.

190년대 한나라의 주요 군벌을 보여주는 지도, 원소 포함


원소는 유표와 동맹을 맺고, 계교 전투에서 공손찬의 정예 기병을 격파했다.[9] 원소는 업으로 돌아가 기주에서 문제를 일으키던 흑산적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여포의 지원을 받아, 원소는 막대한 사상자를 내면서도 흑산적을 물리치는 데 성공했다.[9]

저우서우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위안사오는 장남인 위안탄을 청주로 보냈다.[12] 이후 몇 년 동안 위안사오는 자신의 세력을 공고히 하는 데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위안탄 역시 청주에서 영토를 확장하여, 193년에 공손찬의 장수인 톈카이를 몰아내고,[12] 196년에는 북해 재상 콩롱을 격파했다.[13]

195년, 저수는 원소에게 헌제(獻帝)를 기주로 영접하여 한(漢) 중앙 정부를 효과적으로 통제하고, 황제를 허수아비로 삼아 자신의 정통성을 강화할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곽도순우경은 원소가 그렇게 할 경우 중요한 결정에서 헌제에게 양보해야 한다는 잘못된 논리로 이 제안을 반대했다. 원소는 자율성을 중시하여 곽도와 순우경의 말을 듣고 기회를 놓쳤다. 반면, 조조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헌제를 자신의 근거지인 허창으로 영접했고, 그곳에 새로운 황도(皇都)가 세워졌다.

196년, 조조의 통제를 받는 한 조정은 원소에게 대사마(大司馬)의 자리를 제수했다. 그러나 원소는 대사마가 조조가 맡고 있던 대장군(大將軍)보다 서열이 낮다는 이유로 이 제수를 거부했다.

198년, 원소는 공손찬을 공격하여 그의 잔여 병력을 의경 (현재의 슝현, 허베이성)에서 포위했다. 199년 초, 원소는 의경 전투에서 공손찬을 완전히 격파하고 황하 북쪽의 4개 주의 절대적인 권력을 장악했다.

동탁 토벌군이 해산된 후, 원소는 원술과 대립이 깊어졌다. 원소는 한복과 함께 유우에게 황제 즉위를 요청했지만, 유우는 이를 굳게 거절했다.

193년, 원술이 정식 연주 자사인 금상을 옹립하여 공격해오자, 조조에게 명하여 광정 전투에서 원술을 양주의 수춘으로 물리쳤다. 같은 해, 공손찬이 유우를 살해하고 유우의 구신들이 오환을 끌어들여 공손찬에게 일제히 반란을 일으켰다. 원소는 유우의 아들 유화를 지원하여 그 내분에 개입했고, 포구 전투에서 국의와 유우의 구신들이 공손찬을 격파하자, 공손찬은 역경성에 웅거했다.

2. 4. 조조와의 대립과 관도 대전

192년, 동탁여포에게 살해된 후, 동탁의 잔당 이각 등이 장안에 내습하여 조정은 혼란에 빠졌다. 원소는 헌제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고 황실이 쇠락했다고 여겨 참모 곽도의 황제 영입 제안을 거절했다.[57] 조조는 헌제를 보호하며 명분을 얻어 원소가 누리던 명분적 우위를 뒤집었다.[57] 본래 조조는 원소의 도움으로 성장했으나, 황제를 보호하며 크게 두각을 나타내자 원소는 후회했다.[57]

원소는 헌제에게 상소문을 올려 황제의 권위에 물러서는 입장을 보였으나, 조조가 대장군에 오르고 원소를 태위에 임명하자 이를 사양했다.[57] 조조에 대해 "수차례나 죽을 지경에 놓인 것을 그때마다 번번이 구해주었더니 이제는 황제를 끼고서 나에게 호령하는구나."라고 분노하며 대장군 지위를 원소에게 양보하게 만들었다.[57] 대장군 취임을 놓고 벌어진 알력싸움은 원소의 승리로 끝났지만, 양자의 충돌은 시간문제가 되었다.[57]

199년, 공손찬을 멸망시키고 그 영토를 병합하여 기주(冀州)·유주(幽州)·병주(幷州)·청주(靑州) 등 4주에 세력을 미치게 했다.[57] 원담을 청주자사(靑州刺史), 원희를 유주자사(幽州刺史), 조카 고간을 병주목(幷州牧)으로 삼아 통치하게 했다.[57][58]

200년, 유비조조를 배반하고 서주를 점거해 원소와 동맹을 맺자, 참모 전풍조조의 배후를 찌르도록 진언했으나, 원소는 아들의 병을 이유로 허가하지 않아 기회를 놓쳤다.[61] 유비는 패배하여 원소에게 도망쳐 왔다.

곧 원소의 남진이 시작되었다. 원소군은 안량문추 같은 지휘관이 전사하는 손실을 입었지만, 전황은 원소군 우위로 진행되었으며, 조조는 관도에서 원소를 공격했으나 대패하여 진영을 굳게 지켰다.[57] 원소는 관도를 포위공격했으나 조조군도 저항하여 3개월 가까이 함락시키지 못했다.[57] 조조가 관도에서 고립되고 전황이 불리하게 되자, 원소의 선동공작으로 조조 세력권 내 여러 곳에서 원소에 호응한 반란이 일어났다.[57]

하지만 원소의 참모 허유가 배신하여 조조에게 군량고 위치 등 기밀 정보를 가르쳐 줬다.[57] 오소(烏巢)의 보급기지는 조조에게 함락당했으며, 그 책임 소재를 두고 간부들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 장합고람조조에게 투항하여 원소군은 붕괴되었다.[57]

원소는 패잔병들을 수습하여 반란을 평정하였다(201년 4월).[57] 관도에서 패했지만 원소의 세력은 여전히 조조를 웃돌았으나, 관도 패전 이후 병을 얻었고, 202년 5월 경술일(庚戌日)에 걱정 속에 죽었다.[62] 원소는 백성들에게 인정을 베풀었기에, 죽음을 들은 하북 백성들은 슬퍼했다고 한다.[63]

2. 5. 후계자 선정 문제와 원소 세력의 몰락

원소는 자신의 장남 원담이 사치스럽고 교만한 성격을 지녔기 때문에 후계자 선정에 고심했다.[5] 막내아들 원상의 용모와 재능을 아꼈으나 원상은 나이가 너무 어려 후계자로 삼기에 문제가 있었다.[5] 원소의 후처 유부인은 원상을 심하게 편애하여 그를 강하게 지지했으며, 원소 또한 원상을 총애하여 결국 원상이 장성하면 후계자로 삼기로 결심하고 원담을 형의 양자로 입적시켜 자신의 호적에서 폐출시키고 청주의 도독으로 삼아 내보냈다.[5] 저수는 이에 대해 간언했지만 원소는 다른 자식들도 각 주(州)로 내보내 그 역량을 살펴보겠다며 무시했다.[5]

원소는 원상이 장성하여 후계자로서의 경력과 권위를 인정받기 이전에 자신이 죽어 후계 문제에 혼선이 생길 가능성은 전혀 염려하지 않았던 듯하다. 그러나 원소가 병으로 걱정 속에 사망(憂死)함에 따라, 나이가 어렸던 원상은 그 지지 기반이 극히 취약한 상태에서 집권하게 되었다.[62] 원담 또한 청주의 도독으로서 독단적인 행동이 가능한 위치였으므로, 이는 원씨 일족이 내분에 빠져 멸망하는 원인이 된다.

원소 사후, 심배방기는 원상을 지지하며 원담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가 원소의 뒤를 잇도록 밀어붙였다.[5] 원소의 부인 유 부인도 원상을 지지했고, 원담은 청주에서 급히 돌아왔지만 결과를 바꿀 수 없었다.[15] 유 부인은 남편의 죽음 이후 원 가문을 장악하고 질투심에 원소의 다른 다섯 첩을 죽이고 시체를 훼손했다.[15] 저수의 이전 경고대로 원소 세력 내에 혼란이 발생했다.[15]

결국 건안 9년(204)에 조조에 의해 업이 함락되면서 원소의 세력은 사실상 와해되고 만다.[34] 원담은 업이 함락된 이후 조조에게 반기를 들었다가 패하여 죽었다.[34] 원상은 각지를 망명하며 재기를 도모하지만 최후엔 요동에서 공손강에게 살해당하여 그 수급이 조조에게 보내진다.[34] 고간조조에게 항복했다가 군사를 이끌고 업을 습격해 전복시킬 계획을 세웠으나 실패하고 유표에게로 도주하려 했으나 도중에 상락현에서 왕염에게 살해당했다.[34]

조조는 204년 업성을 정복한 후 원소의 묘에 참배했다. 그는 부하들 앞에서 오랜 친구를 위해 비통하게 울었고, 원소의 가족에게 위로의 선물과 정부 연금을 지급했다.[16]

3. 평가

진수는 원소를 유표와 묶어 모두 위엄과 무용이 있었고, 넓은 도량과 식견이 있었기에 그 당시 이름을 떨쳤다고 평가했다. 유표는 장강 남쪽을 지배하고, 원소는 황하 북쪽에 세력을 구축하였으나, 그들은 모두 겉으로는 관대했지만 속으로는 질시하고, 모략을 좋아하였으며, 결단력이 없고, 인재가 있어도 등용하지 않고, 예의를 버리고 편애를 숭상했으므로, 후계자의 시대에 이르러서 고통을 당하고 사직이 엎어졌어도 결코 불행한 것이 아니라고 평했다. 초나라 항우범증의 계략을 듣지 않아 왕업을 잃었는데, 원소가 전풍을 죽인 것은 항우의 실책보다 더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진수는 원소를 부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았으며, 원소의 능력에 대해서는 마지못해 인정하면서도 곧 무자비하게 원소를 깎아 내렸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의 저자 나관중(羅貫中)은 원소를 우유부단하고 무능한 인물의 전형으로 묘사했다. 독선적이고 과감한 면모를 보이던 원소는 삼국지연의의 대중적인 인기에 힘입어 우유부단함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로 인물상이 왜곡되었고 이 시각은 수백년간 지속되어 현대에도 원소는 우유부단한 인물의 표상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후한서 등의 다른 기록을 보아도 원소는 그의 실책보다는 위진을 정통으로 하는 시각의 영향으로 인해 크게 폄하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시각에서 다소 자유로울 수 있었던 후한서의 저자 범엽은 원소를 "본디 원소는 호협한 기백으로써 따르는 무리를 얻었으며, 마침내는 웅패의 뜻을 마음에 품었다. 천하의 승병(이기는 군사)들을 이끌며 이로써 위명을 떨치지 않는 것이 없었고 시험에 직면함에 이르러서는 과감히 결단하여 맞섰으므로 이에 날랜 장정들은 목숨을 다투어 그를 따랐으며, 깊은 꾀를 가지고 또한 의론에 뛰어나 지혜 있는 선비들도 그에게 마음이 기울어졌다. 성재는 여기서 비롯된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평가했다. 또한, 원소가 실패한 이유 역시 진수와는 다르게 "자긍심이 강해 오만하며 스스로의 기량을 지나치게 과신했으므로 (다른 사람의 간언을 받아들이며)선을 행하는 데에 문제가 있었다. 그렇기에 관도에서 패하기에 이른 것이다."라고 평가했다.

원소는 하는 일마다 실패를 반복했다.


  • 십상시를 전부 죽이는 데 성공했으나 뒤늦게 나타난 동탁이 자신이 십상시 토벌에 아무 기여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낙양에 눌러살게 되었으며 이 때 동탁은 엄청난 전횡을 일삼았다.
  • 동탁을 피해 도망가면서 인재를 모집했는데 모집했다는 인재들이 안량이나 문추같은 형편없는 인물들이었다.
  • 동탁이 옹립한 후한 헌제를 인정할 수 없다며 유우를 옹립했으나 이게 되려 원소가 황제를 부정하는 인물로 낙인찍히는 원인이 되었다.
  • 국의가 자신의 능력과 공만 믿고 함부로 행동하자 국의를 처형했는데 그 이후부터 공손찬과의 싸움이 매우 어려워졌다.
  • 관도 대전이 벌어져 조조와 맞붙게 되었는데 이 때 자신의 휘하에서 오래 있었던 곽도를 편애하고 능력이 뛰어난 저수전풍을 멀리했는데 그 결과 조조군과 싸우기만 하면 패배했다.
  • 문추를 출진시키면서 그 부장으로 유비를 딸려줬으나 유비는 도망갔고 문추는 전사했다.
  • 자신의 태생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정실 부인을 황실 종친인 유씨로 맞이했으나 이 유씨의 성품은 참으로 고약했다. 자신이 낳은 원상만 편애했으며 원소가 사망하자 원소의 첩 5명을 참수하고 그 5개의 머리에 온갖 낙인을 찍었다. 또한 유씨가 원소 세력의 분란을 심하게 조장하여 결국 원소 세력은 멸망하게 되었다.


진수는 "원소의 위용은 당당하고, 명성은 천하에 떨쳐, 하북에 할거했다"라고 전제하면서도, 역시 군웅이었던 유표와 함께 묶어 "그러나, 겉으로는 관대하게 행동하면서 속으로는 시기심이 강했고, 모략을 좋아하면서 결단력이 부족했다. 또한, 뛰어난 인물이 있어도 등용하지 못했고, 충언을 들어도 실행하지 못했다. 장자를 폐하고 서자를 후계자로 삼으려 했으며, 예의를 버리고 개인적인 정을 중시했다. 그러므로 그 사후, 자손이 곤궁해지고, 영지를 잃은 것은 당연했다"라고 평했다. 조조손권의 후계자 다툼 때에도, 원소와 유표는 좋지 않은 선례로 언급되었다.

4. 원소를 섬긴 사람들

고간, 장홍, 선우보, 원담, 원희, 원상의 속관과 원소 사후의 행적만 있는 사람들을 제외하고, 직접적으로 원소 휘하에서 활동한 사람들이다. 고간, 장홍, 선우보, 원담, 원희, 원상 등의 항목을 참조할 수 있다.



나관중의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신명과 진진이 원소를 섬겼다고 기록되어 있다.

5. 가족 관계

원소는 허난성 상수이현에 위치한 여양현 (汝陽縣), 유남군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서기 1세기부터 고위직에 많은 인물을 배출하며 4대에 걸쳐 한나라의 유력 가문으로 자리 잡았다. 한 장제 재위 기간에 벼슬을 지낸 원안의 후손인 원소는 원봉(袁逢)의 아들이었다.


  • 조상
  • * 원안(袁安), 증조부, 사도, 사공 역임
  • * 원경(袁京), 고조부, 사공 역임
  • * 원탕(袁湯), 조부, 사도, 사공, 태위 역임
  • 아버지
  • * 원봉(袁逢), 사공 역임
  • * 원성(袁成), 숙부, 원소는 원성에게 입양됨.
  • 숙부
  • * 원외(袁隗), 숙부, 사도, 태부 역임
  • 형제
  • * 원기(袁基), 형, 사도 역임
  • * 원술, 동생, 군벌, 후에 중의 황제 자칭
  • * 원유 (종형)
  • 배우자
  • * 정실 부인, 원담(袁譚)과 원희(袁熙)를 낳음
  • * 유부인(劉夫人), 원상(袁尚)을 낳음
  • * 5명의 첩, 모두 유부인에 의해 살해됨
  • 자녀
  • * 원담, 장남, 아버지 사후 원상과 전쟁, 조조에게 죽음
  • * 원희, 차남, 원소 사후 유주로 이동, 이후 원상과 요동으로 도망, 공손강에게 죽음
  • * 원상, 삼남, 원소의 후계자, 아버지 사후 원담과 전쟁, 원희와 함께 요동으로 도망, 공손강에게 죽음
  • * 원매 (사남, 일설에는 형의 자식)
  • 친척
  • * 원이(袁遺), 사촌 형, 장안령, 양주자사 역임
  • * 원서(袁敘), 사촌 동생
  • * 원윤(袁胤), 사촌 동생, 단양태수 역임
  • * 원만래(袁滿來), 사촌
  • * 원의달(袁懿達), 사촌
  • * 원인달(袁仁達), 사촌
  • * 고간, 조카
  • * 양표 처 (누이 또는 여동생)
  • * 고궁 처 (누이 또는 여동생)
  • * 이선 (인척)


여남 원씨 가계도

6. 각주

참조

[1] 문서 Benchu
[2] 서적 Houhanshu
[3] 서적 Sanguozhi
[4] 논문 2007
[5] 서적 Sanguozhi
[6] 서적 Book of the Later Han
[7] 서적 Houhanshu
[8] 서적 Sanguozhi
[9] 서적 Houhanshu
[10] 논문 2007
[11] 논문 1996
[12] 논문 2007
[13] 논문 2007
[14] 문서
[15] 서적 Dianlun in Sanguozhi
[16] 논문 1996
[17] 서적 后漢紀
[18] 서적 后漢書·孝献帝紀
[19] 문서 太僕
[20] 서적 後漢書
[21] 서적 三国志
[22] 서적 三国志
[23] 문서 死者は2,000人余りに及び、髭が薄いために誤って殺された者もいたという。
[24] 서적 三国志
[25] 서적 三国志
[26] 서적 三国志
[27] 문서 三国志演義
[28] 서적 三国志
[29] 서적 英雄記
[30] 서적 三国志
[31] 서적 三国志
[32] 서적 三国志
[33] 서적 三国志演義
[34] 서적 後漢書
[35] 서적 三国志
[36] 서적 영웅기
[37] 서적 후한서
[38] 서적 삼국지
[39] 서적 삼국지
[40] 서적 삼국지
[41] 서적 삼국지
[42] 서적 삼국지
[43] 서적 삼국지
[44] 서적 삼국지
[45] 서적 헌제춘추
[46] 서적 위서
[47] 서적 삼국지
[48] 삼국지 삼국지
[49] 삼국지 삼국지
[50] 삼국지 삼국지
[51] 삼국지 삼국지
[52] 서적 후한서
[53] 서적 후한서
[54] 서적 후한서
[55] 삼국지 삼국지
[56] 삼국지 삼국지
[57] 문서 병주자사
[58] 문서
[59] 서적 자치통감
[60] 서적 후한서
[61] 문서
[62] 삼국지 삼국지
[63] 서적 헌제춘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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